성경과 삶의 이야기

아인 랜드가 '이타주의는 악'이라 말한 진짜 이유: 자발적 자유와 진정한 나눔의 가치

일하루 2025. 6. 16.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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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타주의는 악이다(Altruism is evil)."

 

러시아 출신 미국 철학자이자 소설가인 아인 랜드(Ayn Rand)의 이 선언은 처음 들으면 충격적입니다. 우리가 미덕으로 배워온 '남을 돕는 행위'를 악으로 규정하다니, 대체 무슨 의미일까요? 혹자는 그녀를 극단적인 이기주의자로 치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녀의 주장을 깊이 들여다보면, 이는 단순한 '이기심 예찬'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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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아인 랜드의 이 급진적인 사상과, 놀랍게도 성경 고린도후서 9장 7절의 원칙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이를 통해 '강요된 선행'이 아닌, '자발적 자유에 기반한 이타주의'야말로 진정한 나눔의 본질이라는 점을 탐색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사상은 출발점은 다르지만, '강제성을 배제한 개인의 주체적 선택'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놀라운 통찰의 접점을 보여줍니다.

아인 랜드, 왜 '이타주의는 악'이라고 선언했는가?

아인 랜드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그녀가 사용한 '이타주의'라는 단어의 정의부터 명확히 해야 합니다. 그녀가 비판한 이타주의는 단순히 남을 돕는 친절한 행위 그 자체가 아닙니다.

1. 랜드가 정의한 '이타주의'의 진짜 의미

랜드에게 이타주의란 "타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라고 여기는 윤리 체계"를 의미합니다. 즉, 나의 행복, 나의 이익, 나의 삶보다 타인의 필요를 우선시하고, 나를 버려서라도 남을 위해 봉사해야만 '선(善)'이라고 가르치는 사상입니다. 반대로 나 자신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는 것은 '악(惡)'으로 규정되는 도덕관입니다. '너는 다른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메시지가 그 핵심에 깔려 있습니다.

2. 자기희생 강요가 낳는 비극

그렇다면 왜 이것이 '악'일까요? 랜드는 이러한 의무적 자기희생의 강요가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도덕적 독(毒)이라고 보았습니다.

첫째, 개인의 권리와 자율성을 부정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을 영위하고 행복을 추구할 기본적인 권리가 있습니다. 이는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개인의 주권입니다. 하지만 이타주의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라'는 명령을 통해 이 권리를 박탈하고, 개인을 타인이나 사회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킵니다.

둘째, 죄책감을 통해 사람을 조종합니다. '희생하지 않는 너는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이라는 프레임은 강력한 통제 수단이 됩니다. 사람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혹은 도덕적인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행동하게 됩니다. 이는 자발적인 선행이 아닌, 감정적 협박에 의한 굴복일 뿐입니다.

셋째, 궁극적으로 강제(coercion)를 정당화합니다. 희생이 도덕적 '의무'가 되면, 그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사람에게 강제력을 행사할 명분이 생깁니다. 이는 국가가 '공동선'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의 재산을 빼앗거나(과도한 세금 등), 사회가 특정 방식의 기부나 봉사를 강요하는 형태로 나타납니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은 사라지고, 집단의 강요만 남게 됩니다. 랜드는 이 지점에서 자유가 질식한다고 보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랜드가 '악'이라고 지칭한 것은 '남을 돕는 행위'가 아니라, '도우라'고 강요하는 시스템과 도덕적 압박 그 자체였습니다. 친구를 돕고 싶어서 돕는 것, 거래를 통해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것과 같은 자발적 행위는 그녀의 철학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핵심은 '자유의지'의 유무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자발적 자유의 원칙

놀랍게도, 이러한 '강제성에 대한 거부'와 '자발적 선택의 존중'이라는 원칙은 성경에서도 명확하게 발견됩니다. 고린도후서 9장 7절은 나눔과 헌금의 본질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이 구절을 랜드의 철학과 나란히 놓고 분석해 보면 놀라운 공통점이 드러납니다.

  1.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이는 나눔의 주체가 '나 자신'임을 선언합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결정하고 판단하여 행하는 것입니다. 이는 개인의 주체성과 자율적인 결정권을 최우선으로 존중하는 태도입니다. 외부의 압력이나 규칙이 아닌, 내면의 자발적인 결단이 행동의 시작점입니다.
  2.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이 구절은 강제성을 명백히 배제합니다. '억지로(under compulsion)' 하지 말라는 것은, 랜드가 그토록 경계했던 외부의 강제력(coercion)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국가의 법률뿐만 아니라, 공동체 내의 눈치나 사회적 압박, 죄책감 같은 심리적 강요까지 포함됩니다. 마지못해 하는 선행, 체면 때문에 하는 기부는 이 원칙에 어긋납니다.
  3.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여기서 '즐겨 내는 자(a cheerful giver)'라는 표현은 나눔의 동기가 기쁨과 자발성에 있음을 보여줍니다. 강요나 의무감에서 비롯된 행위는 결코 즐거울 수 없습니다. 자신의 가치와 신념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한 행동만이 진정한 기쁨을 낳습니다. 이는 랜드가 말한 '합리적 이기주의(rational self-interest)'가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과도 맥을 같이 합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위해 나의 자원을 사용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기쁨이자 자기실현의 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자발적 자유에 기초한 이타주의: 진정한 나눔의 시작

아인 랜드와 고린도후서의 가르침을 종합해 보면, 우리는 '진정한 이타주의'에 대한 새로운 정의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자신의 주체적인 판단과 자유로운 선택에 따라 타인에게 자발적으로 베푸는 행위'입니다.

 

이러한 나눔은 더 이상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 가치의 '확장'이자 '실현'입니다. 내가 번 돈으로 가난한 아이를 후원하기로 '스스로' 결정했을 때, 그 행위는 나의 노동의 가치를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곳에 쓰는 주체적인 행위입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기에 그 행위에는 온전히 나의 의지가 담겨 있으며, 죄책감이 아닌 보람과 기쁨이 따릅니다.

 

반면, '부자니까 이만큼은 기부해야 한다'는 사회적 압박에 못 이겨 돈을 낸다면 어떨까요? 그 행위는 나의 자유를 침해하고, 나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부정하는 강탈과 다르지 않습니다. 기쁨 대신 분노와 억울함이 남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랜드가 '악'이라고 부른 이타주의의 실체입니다.

결론: 강요된 선행을 넘어, 자유인의 이타주의로

"이타주의는 악이다"라는 아인 랜드의 선언은, '착하게 살지 말라'는 냉소적인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당신의 삶은 당신의 것이며, 당신의 선행조차 당신의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자유의 외침이었습니다.

 

우리는 타인을 돕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동력은 죄책감이나 사회적 의무, 국가의 강제력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각 개인이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마음으로 타인과 함께할 때, 비로소 세상은 더 풍요롭고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억지로' 하는 선행이 아닌 '마음에 정한 대로' 하는 나눔, '즐겨 내는' 자의 기쁨이 가득한 사회. 이는 아인 랜드가 꿈꾼 이상적인 개인들의 사회이자,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나눔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강요된 선행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자유로운 개인의 주체적이고 기쁜 나눔을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이타주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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