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인물 이야기

르호보암: 분열의 씨앗을 뿌린 왕

일하루 2025. 4. 28. 1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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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지혜와 부귀영화의 상징과도 같았던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 잠들었다. 그의 시대는 눈부셨지만, 그 그늘 또한 짙었다. 과도한 건축 사업과 국제결혼, 그리고 말년의 우상숭배는 통일 왕국의 기반을 서서히 좀먹고 있었다. 이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차례였다. 그의 어머니는 암몬 여인 나아마였으니, 그의 혈통 속에는 이미 이방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쩌면 그의 정체성에는 처음부터 미묘한 균열이 내재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르호보암은 41세에 왕위에 올랐다. 아버지 솔로몬의 후광은 그에게 기회이자 동시에 엄청난 부담이었다. 그는 아버지만큼, 아니 아버지를 능가하는 왕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왕국의 모든 지파 대표들이 새로운 왕을 맞이하기 위해 세겜으로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는 애굽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돌아온 여로보암도 있었다. 그는 솔로몬의 강압적인 통치, 특히 과중한 세금과 강제 노역에 지친 북쪽 지파 백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백성들의 요구는 명료했다. "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왕은 이제 왕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시킨 고역과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왕을 섬기겠나이다" (역대하 10:4). 이는 단순한 불평이 아니었다. 새로운 시대에 대한 희망과, 과거의 압제에서 벗어나고픈 간절한 염원이 담긴 호소였다.

 

르호보암은 즉답을 피하고 사흘의 말미를 요청했다. 현명한 처사처럼 보였다. 그는 먼저 아버지 솔로몬을 섬겼던 노련한 원로들에게 자문을 구했다. 그들의 조언은 지혜로웠다. "왕이 만일 이 백성을 후대하여 기쁘게 하고 선한 말을 하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역대하 10:7). 백성의 마음을 얻는 것이야말로 왕권의 가장 튼튼한 기반임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잠시 백성에게 고개를 숙이는 듯 보여도, 결국 그것이 왕국 전체를 위한 길이라는 현실적인 조언이었다.

 

그러나 르호보암의 마음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젊음의 혈기와 오만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원로들의 조언은 나약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자신과 함께 자라난 젊은 신하들에게 눈을 돌렸다. 그들은 왕의 비위를 맞추는 데 익숙했고, 강함과 권위를 과시하는 것만이 진정한 왕의 길이라고 부추겼다.

 

"내 새끼 손가락이 내 아버지의 허리보다 굵으니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치셨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하리라 하소서" (역대하 10:10-11). 이 얼마나 어리석고 오만한 대답인가! 젊은 신하들의 입에서 나온 이 말은 르호보암의 교만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는 이것이 강력한 왕권을 보여주는 길이라 착각했다. 백성들의 고통에 공감하기보다, 그들의 요구를 굴복시켜야 할 도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사흘 후, 다시 모인 백성들 앞에서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지혜를 버리고 젊은이들의 독기 서린 조언을 택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백성들의 마지막 희망마저 짓밟는 망치와 같았다.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더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치셨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치리라" (역대하 10:14).

 

결과는 즉각적이고 파멸적이었다. 분노한 북쪽 열 지파는 외쳤다.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보라" (역대하 10:16). 한때 다윗과 솔로몬 아래 하나였던 왕국은 그렇게 두 동강이 났다.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한 북이스라엘과,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 남은 남유다로 갈라선 것이다. 이는 단순히 정치적인 분열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계획 아래 세워졌던 통일 왕국의 이상이 인간의 교만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역대하 기자는 이 모든 일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역대하 10:15)고 기록하며, 실로암 사람 아히야를 통해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한다.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는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르호보암은 사태의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강제 노역 감독관이었던 하도람(아도니람)을 보내 북쪽 지파를 회유하려 했지만, 분노한 백성들은 그를 돌로 쳐 죽였다. 왕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르호보암 자신도 급히 병거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도망쳐야 했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르호보암은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였다. 그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에서 18만 명의 정예 용사를 모아 북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여 빼앗긴 왕국을 되찾으려 했다. 막강한 군사력을 동원해 잃어버린 영토와 권위를 회복하려는 무모한 시도였다. 그러나 이때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가 나타나 그의 길을 막아섰다.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와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내게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역대하 11:4). 하나님의 명백한 개입이었다. 르호보암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군대를 해산시킬 수밖에 없었다. 비록 불만스러웠겠지만, 더 이상의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은 막을 수 있었다.

 

이제 그의 왕국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남쪽의 작은 영토로 축소되었다. 그는 남은 영토라도 지키기 위해 유다 여러 성읍에 요새를 건축하고 군량과 기름, 포도주를 비축하며 방비를 강화했다. 베들레헴, 에담, 드고아, 벧술, 소고, 아둘람, 가드, 마레사, 십, 아도라임, 라기스, 아세가, 소라, 아얄론, 헤브론 등 견고한 성읍들을 더욱 강화하고 방패와 창을 준비하며 군사력을 증강시켰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이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를 세우고 레위인이 아닌 일반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는 등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의 길을 걷자, 북쪽에 살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 그리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기고자 했던 백성들이 자신들의 산업과 거주지를 버리고 예루살렘과 유다로 내려왔다. 이들은 3년 동안 르호보암을 도와 그의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다. 다윗과 솔로몬의 길을 따랐던 초기 3년 동안은 유다가 잠시 안정을 찾는 듯 보였다.

 

그러나 르호보암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교만과 세속적인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는 18명의 아내와 60명의 첩을 두어 28명의 아들과 60명의 딸을 낳았다. 많은 자녀는 고대 왕권의 힘을 상징하기도 했지만, 이는 동시에 그의 정욕과 왕국의 자원을 낭비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여러 아내 중에서도 압살롬의 딸(혹은 손녀) 마아가를 가장 사랑하여, 그녀의 아들 아비야를 후계자로 정하고 다른 아들들보다 높였다. 그는 아들들을 유다 전역의 요새화된 성읍에 흩어 배치하고 풍족한 생활을 보장해 줌으로써 잠재적인 왕위 다툼을 예방하려 했다. 이는 정치적으로는 현명한 조치였을지 모르나, 그의 마음이 하나님보다 세상의 방식과 안정에 더 기울어져 있음을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르호보암과 유다는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못했다. 나라가 강성해지고 안정을 찾자, 그들은 교만해져서 여호와의 율법을 버렸다. "르호보암이 강성하여 세력이 견고해지매 여호와의 율법을 버리니 온 이스라엘이 본받은지라" (역대하 12:1). 왕의 영적 타락은 백성 전체에게 악영향을 미쳤다. 유다 땅 곳곳에 산당과 우상, 아세라 목상이 세워졌고, 가나안 족속의 가증한 풍습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남색하는 자들이 그 땅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국민의 모든 가증한 일을 백성들이 본받아 행했다(열왕기상 14:23-24). 이는 솔로몬 말년의 우상숭배를 답습하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체되지 않았다. 르호보암 제5년에 애굽 왕 시삭(성경 외 역사에서는 파라오 쇼솅크 1세로 추정됨)이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공했다. 병거 1,200대와 마병 60,000명,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리비아, 숙, 에티오피아 용병들이 함께했다. 시삭의 군대는 유다의 견고한 성읍들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순식간에 예루살렘까지 밀고 들어왔다. 한때 강성했던 유다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져 내렸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선지자 스마야가 다시 르호보암과 유다의 방백들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버렸으므로 나도 너희를 버려 시삭의 손에 넘겼노라" (역대하 12:5). 그제야 르호보암과 방백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스스로 겸비하여 "여호와는 의로우시다" (역대하 12:6)고 고백했다.

 

그들의 겸비한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은 진노를 돌이키셨다.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으시되, 시삭의 손을 통해 징계하시기로 결정하셨다. "그들이 스스로 겸비하였으니 내가 멸하지 아니하고 저희를 조금 구원하여 나의 노를 시삭의 손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쏟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들이 시삭의 종이 되어 나를 섬기는 것과 세상 나라들을 섬기는 것이 어떠한지 알게 되리라" (역대하 12:7-8). 하나님을 섬기는 대신 세상 권력을 의지하고 따를 때 어떤 비참한 결과를 맞게 되는지 깨닫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었다.

 

시삭은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의 보물들을 모조리 약탈해갔다. 그중에는 솔로몬이 만들었던 금 방패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한때 예루살렘의 영광과 부를 상징했던 그 눈부신 금 방패들은 이제 애굽 왕의 전리품이 되어 사라졌다. 르호보암은 그 빈자리를 놋쇠로 방패를 만들어 채우고, 왕궁 문을 지키는 경비 책임자들에게 맡겼다. 왕이 성전에 들어갈 때마다 경비병들이 그 놋 방패를 들고 따랐다가 다시 경비실로 가져다 놓았다. 금을 놋으로 대체한 이 사건은 르호보암 시대 유다 왕국의 영광이 얼마나 퇴색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슴 아픈 장면이다. 화려했던 과거의 영광은 사라지고, 초라한 현실만이 남은 것이다.

 

르호보암은 스스로 겸비했기에 하나님의 완전한 진노는 피할 수 있었고, 유다에는 아직 선한 일도 남아 있었다 (역대하 12:12). 그러나 그의 통치는 근본적으로 실패했다. 성경은 그의 인생을 이렇게 평가한다. "르호보암이 악을 행하였으니 이는 그가 여호와를 구하는 마음을 굳게 하지 아니함이었더라" (역대하 12:14). 그는 17년 동안 예루살렘을 다스렸고, 그 기간 내내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과 전쟁을 계속했다. 통일 왕국의 분열은 고착화되었고, 두 왕국은 서로를 적대하며 힘을 소진했다.

 

르호보암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막강한 왕국의 상속자였지만, 교만과 어리석은 판단으로 그 유산을 순식간에 잃어버렸다. 젊은 시절의 혈기와 잘못된 조언에 귀 기울인 대가는 혹독했다. 또한, 어려움 속에서 잠시 겸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찾고 의지하는 마음을 굳게 세우지 못했을 때 결국 실패와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그의 삶은 리더의 지혜와 겸손,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역사적 교훈으로 남아있다. 그의 통치 아래 시작된 남북 분열의 비극은 이후 이스라엘 역사의 오랜 아픔으로 이어지게 된다. 르호보암, 그는 축복의 상속자였으나 스스로 분열의 씨앗을 뿌린 왕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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