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 들판의 바람 소리
유다 땅 베들레헴, 아버지 이새의 여덟 아들 중 막내로 태어난 소년 다윗에게 세상은 드넓은 초원과 양 떼, 그리고 밤하늘의 별들이 전부였습니다. 형들은 아버지의 인정과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지만, 다윗의 자리는 언제나 양 떼 곁이었습니다. 그는 외로움 속에서 수금을 타며 마음을 달랬고, 밤하늘의 별들을 보며 창조주 하나님을 묵상했습니다. 양들을 지키기 위해 사나운 사자와 곰과 맞서 싸우며 얻은 담대함은 그의 연약한 외모 뒤에 숨겨진 단단한 내면을 증명했습니다. 그는 아직 몰랐습니다. 이 들판에서의 시간이 훗날 이스라엘의 왕좌, 그리고 영원의 역사에 기록될 운명을 준비하는 과정이었음을.
어느 날, 베들레헴에 존경받는 사무엘 선지자가 찾아왔습니다.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이스라엘의 다음 왕에게 기름을 붓기 위함이었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풍채를 자랑하는 형들이 차례로 사무엘 앞에 섰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사무엘의 물음에 이새는 마지못해 들에 있는 막내아들을 떠올렸습니다. 양 냄새가 채 가시지 않은, 볼품없는 소년 다윗이 사무엘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은 양의 뿔에 담긴 기름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들 중에서 다윗에게 부었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강하게 임했습니다. 다윗 자신도 어리둥절했지만, 그의 삶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새로운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습니다. 들판의 노래는 이제 역사의 서곡이 되었습니다.
사울의 궁정, 빛과 그림자
하나님의 영이 떠난 사울 왕은 악령에 시달리며 고통받았습니다. 신하들은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찾아 왕의 괴로움을 달래도록 조언했고, 베들레헴의 이새의 아들 다윗이 천거되었습니다. 양치기 소년은 이제 왕궁의 악사가 되었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탈 때마다 사울을 괴롭히던 악령은 물러가고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총애하여 자기 곁에 두었고, 무기를 드는 자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골리앗이라는 거인 장수가 나타나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하며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이스라엘 병사들은 공포에 떨며 누구도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마침 형들에게 안부를 전하러 전쟁터에 왔던 다윗은 골리앗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분노했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싸우겠다고 자원했습니다. 사울은 그의 어림을 걱정했지만, 다윗은 양을 지키며 사자와 곰을 물리쳤던 경험을 이야기하며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이 내어준 갑옷과 투구를 거절했습니다. 자신에게 익숙하지 않은 무장은 오히려 거추장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는 평소처럼 시냇가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 주머니에 넣고, 손에는 물매를 들고 골리앗에게 나아갔습니다. 골리앗은 소년의 모습을 보고 비웃으며 저주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외침과 함께 다윗이 던진 물매 돌은 정확하게 골리앗의 이마에 박혔습니다. 거인은 맥없이 쓰러졌고, 다윗은 재빨리 달려가 골리앗의 칼을 빼어 그의 목을 베었습니다.
이 승리는 다윗을 순식간에 이스라엘의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성들은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이 노랫소리는 사울의 마음에 깊은 시기와 질투를 심었습니다. 한때 다윗의 수금 소리에 평안을 얻었던 왕은 이제 다윗을 죽이려는 악한 마음에 사로잡혔습니다. 사울은 다윗에게 창을 던져 죽이려 했고, 위험한 전쟁터로 보내 목숨을 잃게 하려 했습니다.
이 어두운 시기 속에서도 다윗에게는 빛과 같은 존재가 있었습니다. 바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의 용기와 믿음에 감탄하여 그를 자기 생명처럼 사랑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위협으로부터 다윗을 보호하고, 그와의 우정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은 정적과 위협이 가득한 왕궁에서 피어난 아름다운 꽃과 같았으며, 훗날 다윗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되었습니다.
광야의 노래, 연단의 시간
사울의 집요한 추격을 피해 다윗은 광야로 도망쳤습니다. 한때 왕궁의 총애받는 신하이자 전쟁 영웅이었던 그는 이제 외로운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고독하고 위험한 광야 생활은 다윗을 더욱 강하게 연단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아둘람 굴에 숨어 지냈고, 그곳으로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이들을 이끌며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비록 오합지졸처럼 보였지만, 이들은 훗날 다윗 왕국의 충성스러운 용사들이 되었습니다.
다윗은 광야를 떠돌며 숱한 위기를 넘겼습니다. 배고픔과 목마름, 끊임없는 추격의 공포 속에서도 그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놓지 않았습니다. 그의 시편 중 상당수는 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시편은 그의 탄식과 부르짖음,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과 찬양,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을 담고 있습니다. 광야는 다윗에게 기도의 골방이자 믿음의 학교였습니다.
두 번이나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엔게디 광야의 굴 속에서, 십 광야의 진영에서 잠든 사울을 발견했을 때, 부하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라며 사울을 제거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며 그들을 만류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정치적 유불리보다 하나님의 주권과 질서를 더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는 다윗이 단순한 용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품은 지도자임을 보여주는 증거였습니다. 그는 복수를 자신의 손으로 행하는 대신 하나님의 심판에 맡겼습니다. 이 인내와 절제의 시간은 그를 왕의 자리에 합당한 인물로 빚어가고 있었습니다.
왕관의 무게, 영광과 오욕
길보아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전사했다는 비보가 다윗에게 전해졌습니다. 특히 자신의 목숨처럼 사랑했던 친구 요나단의 죽음은 다윗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는 옷을 찢고 금식하며 깊이 애도했습니다. 자신을 끈질기게 괴롭혔던 원수의 죽음 앞에서 복수심보다는 연민과 슬픔을 먼저 느낀 것입니다.
다윗은 먼저 유다 지파의 추대를 받아 헤브론에서 유다의 왕이 되었습니다. 7년 6개월 후, 마침내 온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헤브론으로 찾아와 다윗을 이스라엘 전체의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오랜 기다림과 연단의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왕이 된 다윗은 가장 먼저 여부스 족속이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정복하여 수도로 삼았습니다. 견고한 요새였던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의 중심에 위치하여 통일 왕국의 수도로서 이상적인 장소였습니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다윗 성'이라 부르며 정치적, 군사적 중심지뿐 아니라 신앙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오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궤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올 때, 다윗은 왕의 체면도 잊은 채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춤을 추었습니다. 그의 아내 미갈은 이를 보고 왕의 위엄을 떨어뜨린다며 비웃었지만, 다윗에게는 하나님 앞에서의 순수한 경배가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중심을 보시고 그에게 놀라운 언약을 주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을 통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왕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 (사무엘하 7:16) 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이 '다윗 언약'은 다윗 개인을 넘어 그의 후손, 궁극적으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될 영원한 왕국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다윗의 통치는 군사적 성공과 영토 확장으로 강력한 왕국을 건설하며 절정을 맞이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견고해 보이던 다윗의 삶에도 치명적인 균열이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저녁, 왕궁 옥상을 거닐던 다윗은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인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충성스러운 부하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였습니다. 순간적인 욕망에 사로잡힌 다윗은 그녀를 궁으로 불러 동침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밧세바가 임신하자, 다윗은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더욱 끔찍한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는 충직한 우리아를 전쟁터 가장 위험한 곳으로 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왕의 권력을 남용하여 간음과 살인을 저지른 다윗 앞에 나단 선지자가 나타났습니다. 나단은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양 비유를 통해 다윗의 죄를 정확하게 지적했습니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 나단의 날카로운 책망 앞에 다윗은 무너져 내렸습니다. 그는 변명하거나 합리화하지 않고 즉시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통렬하게 회개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시편 51편은 이 때 다윗의 처절한 회개의 심정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회개를 받으셨지만, 죄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밧세바가 낳은 첫 아이는 죽었고, 이후 다윗의 가정에는 칼과 비극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아들 암논이 이복 누이 다말을 욕보이는 사건, 압살롬이 형 암논을 살해하고 반역을 일으키는 사건 등 끔찍한 일들이 연이어 벌어졌습니다. 특히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의 반역은 다윗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는 아들의 칼날을 피해 맨발로 울며 예루살렘을 떠나야 했습니다. 압살롬이 전쟁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다윗은 승리의 기쁨 대신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며 비통하게 울부짖었습니다. 왕관의 무게는 영광인 동시에, 죄로 인한 고통과 슬픔의 무게이기도 했습니다.
저무는 해, 영원을 향한 시선
숱한 영광과 오욕의 세월을 뒤로하고 다윗은 노년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존경받는 왕이었지만, 과거의 잘못으로 인한 상처와 슬픔은 그의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았던 성전 건축의 꿈을 아들 솔로몬에게 넘겨주며,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와 설계를 정성껏 준비했습니다. 이는 자신의 시대를 넘어 다음 세대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성숙한 믿음의 표현이었습니다.
다윗은 죽음을 앞두고 솔로몬에게 마지막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명령과 율법을 지켜 행하라는 신앙의 유산이었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 (열왕기상 2:2-3)
다윗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았습니다. 양치기 소년에서 민족의 영웅으로, 도망자에서 위대한 왕으로, 그러나 동시에 간음과 살인이라는 끔찍한 죄를 짓고 처절하게 회개했던 인물. 그의 삶은 하나님의 놀라운 선택과 은혜가 인간의 연약함과 죄성 속에서도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그는 완벽하지 않았습니다. 넘어지고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하나님께로 돌이켰고, 진심으로 회개했으며, 끝까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신뢰를 놓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평가는 그의 무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의 끊임없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진실한 회개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의 시편은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위로와 용기, 기도와 찬양의 언어가 되고 있습니다.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인간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며, 우리 역시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희망을 건네줍니다. 베들레헴 들판의 바람 소리에서 시작된 그의 노래는 이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을 향해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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