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땅에 쏟아진 물같이 다시 거둘 수 없을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도리어 꾀를 내사 따돌린 자로 하여금 주께 버려지지 아니하게 하시나이다.”
사무엘하 14장 14절은 단 한 절만으로도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무한한 자비를 또렷이 대조합니다. 저는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다윗 왕조의 비극적 긴장 속에서 번뜩이는 신학적 통찰을 마주하게 됩니다.
1. 문맥 파악: 압살롬 귀환을 둘러싼 지혜로운 청원
사무엘하 14장은 살인 후 망명한 압살롬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는 요압의 계획으로 시작됩니다. 요압은 드고아 출신의 지혜로운 여인을 섭외해 비유적 탄원극을 꾸밉니다. 왕 앞에 선 여인은 가상의 가족 비극을 이야기하다가 결정적 근거로 14절을 인용합니다. 즉, “왕이시여, 사람은 한 번 죽으면 되돌릴 수 없지만, 하나님은 생명을 전적으로 끊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압살롬에게도 돌아올 길을 열어 주십시오”라는 논지입니다. 이렇게 14절은 왕의 결단을 촉구하는 수사적 정점으로 배치됩니다.
2. “땅에 쏟아진 물” 비유의 함축성
히브리어 원문에서 “물이 땅에 쏟아짐”(כַּמַּיִם הַנִּגָּרִים אָרְצָה)은 그릇으로 다시 담을 수 없는 완전한 분산을 묘사합니다. 죽음의 불가역성은 인간의 현실적 한계를 냉정하게 드러내며, 모든 지혜와 권력을 가진 왕도 피할 수 없음을 강조합니다. 여인은 이 비유를 통해 다윗에게 시간이 지나기 전 관계 회복을 결단하라고 촉구하지만, 우리가 집중할 지점은 ‘죽음은 되돌릴 수 없다’는 명제 자체입니다. 성경은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인정하면서도, 그 뒤에 이어질 하나님의 행동을 준비합니다.
3. 하나님의 “꾀”(ḥašab): 계략이 아닌 구원의 설계
이어지는 표현인 “꾀를 내사”는 부정적 계략이라기보다 ‘정교한 설계·계획’을 의미합니다. 동일한 어근은 출애굽기 26장에서 성막의 정교한 짜임새를 묘사할 때도 사용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은 생명을 끊어내는 분이 아니라, 끊어진 고리를 재직조하시는 기술자로 그려집니다. 죽음이라는 닫힌 문을 새로 열기보다, 그 문이 닫히기 전 다른 출구를 설계하시는 모습입니다.
4. “따돌린 자”(niḏḏāḥ)의 포괄성
“따돌린 자”는 사회적·종교적·정치적 이유로 공동체 밖에 머물 수밖에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압살롬처럼 살인의 죄책을 안은 인물도 포함되지만, 율법적 정결규정이나 출신 문제로 소외된 무수한 사람들을 함축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주께 버려지지 않게” 만드신다고 선포됩니다. 따라서 14절은 단순히 왕자 한 사람의 복귀 문제가 아닌, 하나님 자비의 보편적 지평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5. 문학적 구조: 대조와 병행으로 압축된 메시지
① A절: “우리는 필경 죽으리니” — 인간의 운명
② B절: “물이 땅에 쏟아진 물같이 다시 거둘 수 없을 것이요” — 불가역성의 시각적 비유
③ C절: “여호와께서는 생명을 빼앗지 아니하시고” — 하나님의 성품 선언
④ D절: “도리어 꾀를 내사 따돌린 자로 하여금 주께 버려지지 아니하게” — 구원의 창의적 전개
A와 B는 인간 측면, C와 D는 하나님 측면을 이루며, 대조를 통해 신학적 메시지를 응축합니다. 특히 “아니하시고”와 “꾀를 내사”의 연결은 부정에서 긍정으로 전환되는 리듬을 만들어 독자에게 희망을 각인합니다. ('따돌린 자로 하여금 주께 버려지지 아니하게'-> 하나님은 인간이 따돌림당한 상태 그대로 버려두지 않고, 돌아올 수 있는 길을 계획하신다)
6. 신학적 핵심: 죽음 앞에서도 중단되지 않는 자비
14절은 죽음이 궁극적 주권을 쥐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자비가 그 위에 있음을 선포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여정에 단절을 가져오지만, 하나님은 단절 너머로 연결의 실마리를 짓기 위해 ‘꾀’를 내십니다. 이 구절은 애초부터 부활이나 사후 세계가 아닌, 역사 현장에서 작동하는 하나님의 창조적 돌이킴을 조명합니다. 죽음 자체를 무효화하지 않아도, 죽음이 남기는 공백을 새로운 서사의 실로 꿰어 가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입니다.
7. 교차점에 선 다윗: 왕권과 자비의 균형
여인의 탄원은 다윗에게 권력과 자비 사이의 균형을 재고하도록 촉구합니다. 왕은 정의의 집행자이자 공동체 화합의 상징입니다. 14절은 그에게 정의를 넘어서는 창조적 자비의 통치가 가능함을 보여주며, 압살롬 사건이 하나님의 큰 계획 안에 포함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본문은 왕의 결단을 직접적으로 기록하지 않지만, 이 논리적 압박 앞에서 다윗이 침묵할 수 없음을 암시적으로 전달합니다.
8. 결론: 죽음의 냉혹함과 자비의 따뜻함을 동시에 붙들다
사무엘하 14장 14절은 죽음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응시합니다. 그러나 그 시선이 머무는 곳은 절망이 아니라, 죽음 너머를 향해 새로운 길을 설계하시는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통해 “죽음은 끝이 아니라 하나님의 꾀가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메시지를 선명하게 받아들입니다. 삶의 적용을 넘어, 본문 자체가 증언하는 신학적 대조와 문학적 아름다움을 음미할 때, 성경이 전하는 깊이는 더욱 뚜렷해집니다.
흩어진 물결, 이어진 숨결
한 방울이 흘러내려
먼 먼지 위에 사라져도
그 울림을 듣는 귀가 있다
모래 틈새로 스민 물줄기
햇살에 흩어져도
그 형체를 잇는 손이 있다
끝이라 말한 그곳에
여전히 이어지는 숨결
나는 흐르고 그분은 모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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